아달베르트 슈티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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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1805년 현재 체코의 호르니 플라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가정교사로 일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자연 묘사와 인간의 조용한 삶을 그린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집 『습작집』, 『갖가지 돌』, 장편 소설 『늦여름』, 『비티코』 등이 있으며,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슈티프터는 프리드리히 니체, 토마스 만 등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일본을 거쳐 한국에도 작품이 소개되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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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베르트 슈티프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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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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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베르트 슈티프터 |
출생일 | 1805년 10월 23일 |
출생지 | 보헤미아 왕국 오버플란 |
사망일 | 1868년 1월 28일 |
사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린츠 |
국적 | 오스트리아 |
묘지 | 린츠 성 바르바라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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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소설가, 시인, 화가, 교육자 |
언어 | |
언어 | 독일어 |
학력 | |
모교 | 빈 대학교 |
활동 | |
활동 기간 | 1830년–1868년 |
장르 | 시적 사실주의 |
주요 작품 | |
주요 작품 | 베르크크리스탈 늦여름 비티코 |
배우자 | |
배우자 | 아말리에 모하우프트 (1837년–1868년) |
기타 | |
데뷔작 | "콘도르"(1841년) |
2. 생애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오늘날 체코 호르니 플라나에 해당하는 보헤미아 오버플란에서 마포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크렘스뮌스터의 김나지움에서 교육받고, 1826년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빈에서 가정교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초기에는 화가를 지망했으나 1840년 단편 「콘도르」(Der Condorde)를 발표하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37년 아말리아 모하우프트와 결혼했으나 순탄치 않았다.
슈티프터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졌으며 1848년 혁명을 지지했다. 그의 사상 중심에는 빌둥(Bildung)(교육을 통한 개인적, 문화적 성숙)이 있었다.[1][2] 이러한 신념에 따라 1848년 이후 린츠(Linz)로 이주하여 초등학교 시찰관으로 활동하며 교육에 힘썼다.
린츠 시대에 『갖가지 돌』(Bunte Steinede), 『늦여름』(Der Nachsommerde), 『비티코』(Witikode) 등 주요 작품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간경변증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고, 186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13]
2. 1. 출생과 성장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1805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남보헤미아 오버플란(현 체코 호르니 플라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슈티프터는 삼베 직조공이었고, 어머니는 마달레나였다. 그는 삼베 직조공의 장남으로, 착실한 소시민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다. 특히 경건한 어머니와 기개 있는 할머니에게서 정서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숲으로 둘러싸인 풍부한 자연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1817년, 슈티프터가 12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삼베를 싣고 가던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할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지냈다. 1819년 가을, 오스트리아 크렘스뮌스터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7년간 공부했다. 이곳 역시 자연이 풍부한 지역이었고, 슈티프터는 대자연과 깊이 교감하며 문학과 예술을 접했다. 이 시기부터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신앙심이 깊었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1826년,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법학 외에도 자연과학 강의를 많이 수강했으며, 예술의 도시 빈에서 음악,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예술을 경험했다. 문학적으로는 장 파울의 작품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스스로 문필가가 되기보다는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 일을 시작하여 빈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뛰어난 교사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마리아 안나 공주(폰 슈바르첸베르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아들인 리하르트 폰 메테르니히도 포함된다.[1][2]
1828년에는 파니 그라이플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으나, 5년간의 관계 끝에 그녀의 부모가 교제를 반대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이별의 아픔은 그에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고, 그는 이 상실감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2. 2. 빈 시대
1826년, 크렘스뮌스터의 김나지움을 마친 슈티프터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빈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강의도 많이 수강했으며, 예술 도시 빈의 음악, 연극,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문학에서는 장 폴의 작품을 탐독하며 영향을 받았지만, 스스로는 문학가보다는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빈의 귀족 가문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는 뛰어난 교사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폰 슈바르첸베르크의 마리아 안나 공주나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아들 리하르트 폰 메테르니히도 포함된다. 가정교사 활동 외에도 그림을 판매하여 수입을 얻었다.
1828년에는 파니 그라이플과 사랑에 빠졌으나, 5년간의 관계 끝에 그녀의 부모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이 실연의 상처는 그에게 깊이 남았다.

이후 1835년 아말리아 모하우프트와 약혼하고 1837년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어 아말리아의 조카 세 명을 여러 차례 입양하려고 시도했으나, 그중 한 명인 줄리아나는 여러 차례 집을 나갔고 결국 사라졌다가 4주 후 다뉴브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는 비극을 겪었다.
화가를 지망했던 슈티프터는 1840년 우연한 계기로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완성 단편 소설 「콘도르」(Der Condor)가 지인의 눈에 띄어 『비엔나 예술원 잡지』에 게재되면서 호평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빈 시대의 작품들은 Studien|슈투디엔de(1844-1850) 6권으로 출간되었으며, 1846년에는 그릴파르처로부터 작품에 대한 칭찬을 받기도 했다.
슈티프터는 강력한 자유주의 신념을 가진 인물로, 1848년 혁명을 지지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 후보로 나설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빌둥(Bildung)(교육을 통한 개인적, 문화적 성숙)에 있었다.[1][2] 1848년 린츠(Linz)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그곳으로 이주하여 빈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했다.
2. 3. 린츠 시대와 말년
1848년 오스트리아 북부의 린츠(Linz)로 이주했다. 그 해 3월 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진정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기초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1][2] 1850년부터 오스트리아 상부(Upper Austria) 지역의 초등학교 시찰관 직책을 맡아 이후 16년간 이 직무에 종사했다.시찰관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꾸준히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1853년에는 돌을 소재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작품집 『갖가지 돌』(Bunte Steinede)을 출판했다. 이 작품집의 서문에서 그는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인간성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인간 세계를 이끄는 "온화한 법칙"이라는 자신의 예술적 신조를 밝혔다. 1857년에는 알프스 산록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 교양 소설의 대표작 『늦여름』(Der Nachsommerde)을 발표했다.
1863년부터 슈티프터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12세기 보헤미아를 무대로 한 역사 소설 대작 『비티코』(Witikode, 1865-1867년)를 병마와 싸우며 집필했다. 슈티프터 부부는 자녀가 없어 두 명의 양녀를 입양했으나, 두 딸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외로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1867년에는 간경변증(cirrhosis) 진단을 받으며 병세가 더욱 심각해졌다.[13]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1868년 1월 25일 밤에서 26일 새벽 사이, 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면도칼로 자해를 시도했다.[3]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흘 뒤인 1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세계
슈티프터의 작품 세계는 아름다움 추구와 도덕적인 삶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의 인물들은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된 자연 풍경 속에서 이상적인 삶을 영위하려 노력한다. 초기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객관적인 리얼리즘 문체로 나아가 정교한 자연 묘사를 통해 인간의 조용한 내면과 삶을 그려냈으며,[14] 이는 당대 비더마이어 운동의 문학적 경향과도 맥을 같이 한다.[4] 그는 화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작품 속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15] 영웅적인 사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검소함, 절제, 자기 극복과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장편 소설이나 단편 소설 형태이며, 여러 버전을 거치며 수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작으로는 장편 소설 『데어 나흐조머』(1857)와 12세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비티코』가 꼽힌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및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자세한 특징과 평가는 하위 섹션에서 다루어진다.
3. 1. 주요 특징

슈티프터 작품은 아름다움 추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도덕적으로 살아가려 애쓰며, 아름답게 묘사된 풍경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초기에는 장 폴이나 E.T.A. 호프만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의 영향이 보였으나, 점차 객관적인 문체의 리얼리즘으로 나아가며 정교한 자연 묘사 속에서 인간의 조용한 삶을 그리는 방향으로 변화했다.[14]

화가이기도 했던 슈티프터는 문학 작품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살려 고향의 숲과 같은 자연을 세밀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의 자연 묘사는 때로는 인간을 압도하는 듯한 엄격함까지 담아낸다.[15]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지만, 토마스 만은 "자연에 대한 그의 묘사의 조용하고 내적인 정확성 뒤에는 과도함, 근원적인 것, 파국적인 것, 병적인 것에 대한 선호가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하며 그의 작품에 숨겨진 깊이를 지적하기도 했다.
슈티프터는 영웅적인 행위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나타나는 검소함, 절제, 자기 극복과 같은 가치에 주목했다. 그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이상적인 세계관은 당시 비더마이어 운동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칼 쇼르스케는 슈티프터의 대표작 『데어 나흐조머』가 빌둥(베네딕트 수도회의 경건함, 독일 휴머니즘, 비더마이어 관습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전파하기 위해 쓰였다고 해석했다.[4]
그의 작품은 동시대 작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프리드리히 헤벨은 슈티프터가 세부 묘사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며 "딱정벌레와 금잔화에만 관심 있는 작가"라고 비판했고,[17] 특히 대표작 『데어 나흐조머』에 대해서는 "전부 읽은 사람에게는 폴란드 왕관을 수여하겠다"고 혹평했다.[18] 헤벨이 비판했던 바로 그 세부 묘사 덕분에 현대의 학자들은 슈티프터의 작품에서 '사물' 자체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높이 평가한다. 사물과 자연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인간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면, 프리드리히 니체는 『데어 나흐조머』를 고트프리트 켈러의 『젤드빌라 사람들』(Die Leute von Seldwyla|디 로이테 폰 젤트빌라de)과 더불어 19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소설 두 편으로 꼽으며 극찬했다.[5][19] 토마스 만 역시 슈티프터를 "세계 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고, 가장 심오하며, 가장 은밀한 대담함을 지닌, 가장 신비로운 감동을 주는 소설가 중 한 명"이라고 칭송하며 그의 작품들을 평생 애독했다.[21] 이러한 평가는 슈티프터의 작품이 지닌 독특한 문학적 가치를 보여준다. 그의 역사 소설 ''비티코''는 일부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에게는 칭찬을 받았으며,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이 작품을 읽으며 큰 위안을 얻었다고 전해진다.[6]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제대로 지휘하려면 슈티프터를 읽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22]
3. 2. 사상과 철학
슈티프터의 작품은 아름다움 추구를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도덕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며, 화려하게 묘사된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표면적으로 그의 글에서는 악, 잔혹함, 고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자연에 대한 그의 묘사의 조용하고 내적인 정확성 뒤에는 과도함, 근원적인 것, 파국적인 것, 병적인 것에 대한 선호가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의 작품 세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슈티프터의 작품이 당대의 더 유명하고 현실적인 작가들에 비해 단편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비전은 문학사적으로 비더마이어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칼 쇼르스케는 슈티프터가 그의 소설 ''데어 나흐조머''를 통해 빌둥(Bildung, 교육을 통한 개인적, 문화적 성숙)이라는 개념, 즉 베네딕트 수도회의 세계적 경건함, 독일 휴머니즘, 그리고 비더마이어 시대의 관습이 결합된 이상을 설명하고 전파하려 했다고 분석했다.[4]
빌둥 개념은 그의 대표작 ''데어 나흐조머''(1857)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고트프리트 켈러의 ''젤드빌라 사람들''(Die Leute von Seldwyla|디 로이테 폰 젤트빌라de)과 함께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소설 두 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5] ''데어 나흐조머''는 빌둥스로만(성장 소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지만, 출간 당시에는 엇갈린 반응을 얻었다.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은 슈티프터를 "딱정벌레와 금잔화에만 관심 있는 작가"라고 비판하며, 그의 소설을 끝까지 읽는 사람에게는 폴란드 왕관을 주겠다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헤벨이 지적한 지나친 세부 묘사는 현대에 와서 재평가받고 있다. 크리스틴 외르텔 쇠그렌과 같은 학자들은 이러한 세밀함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슈티프터의 의도를 보여주며, 소설 속 예술과 자연의 사물들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작품인 역사 소설 ''비티코''는 12세기를 배경으로 하며, 출간 당시 많은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으나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과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비티코''를 읽으며 큰 위안을 얻었다고 전해진다.[6]
3. 3. 비평과 영향
슈티프터의 작품은 동시대 및 후대 작가와 사상가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동시대 작가 헤벨은 슈티프터가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고 비판했으며,[17] 대표작 『늦여름』에 대해서는 "전부 읽은 사람에게는 폴란드 왕관을 수여하겠다"라고 혹평했다.[18] 이는 슈티프터가 영웅적인 행위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 검소함, 절제, 자기 극복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소하고 평범한 것에서 위대함을 찾으려 했던 그의 문학관과 관련된 비판이었다.[14]반면, 철학자 니체는 『늦여름』을 "반복해서 읽을 만한" 19세기 후반 독일의 뛰어난 산문 중 하나로 극찬했다.[19] 토마스 만 역시 슈티프터를 깊이 존경하여 "세계 문학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수수께끼 같고, 가장 비밀스럽게 대담하며, 가장 이상하게 매력적인 이야기꾼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으며, 『습작집』, 『돌 이야기』, 『늦여름』, 『비티코』 등 여러 작품을 평생 애독했다.[21] 하이데거 또한 학생 시절부터 슈티프터에게 친숙했으며, 『니체 강의』에서 니체를 바그너적인 것의 정반대에 위치시키기 위해 슈티프터를 언급하기도 했다.[20]
릴케[9]와 휴고 폰 호프만슈탈[10] 역시 그의 예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W. G. 제발트는 슈티프터에게 영향을 받은 작가로 언급된다. 영국 시인 W. H. 오든과 미국 시인 마리안느 무어는 그의 작품을 존경했는데, 무어는 1945년 엘리자베스 마이어와 함께 『베르크크리스탈(Bergkristall)』을 『암석 수정(Rock Crystal)』으로 공동 번역했다. 오든은 자신의 시 "아카데믹 그라피티(Academic Graffiti)"에서 슈티프터를 다음과 같은 클레리휴(clerihew)로 묘사했다: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 무게를 들지는 않았네: / 그는 늙은 죄수들을 고용하여 / 자신의 가방을 나르게 했지."[8]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늑대(Steppenwolf)』에서는 주인공 해리 할러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예를 따라 면도하다가 사고를 당할 때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지휘하려면 슈티프터를 읽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전해진다.[22]
슈티프터의 작품은 일찍부터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독일계 미국 정치가 칼 슈르츠는 1852년 이전 스위스에서 만난 여관 주인의 딸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 슈티프터의 『슈투디엔(Studien)』이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7]
일본에서는 다이쇼 시대부터 슈티프터의 작품이 수용되기 시작했으며, 작가 호리 타쓰오는 고등학교 시절 수업에서 『고목림』(Der Hochwald)을 강독했다고 언급했다.[23] 이후 일본에서는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이 번역되었다. 현대 작가 중에서는 독일 문학자이기도 한 후루이 유키치가 슈티프터를 오랫동안 좋아하는 작가로 꼽으며 자신의 작품에서 종종 언급하고 있다.[24]
4. 주요 작품 목록
슈티프터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발표 연도 순으로 정렬하였다.
- 율리우스 Juliusdeu (1830)
- 콘도르 Der Condordeu (3권, 1839)
- 들꽃 Feldblumendeu (1841)
- 옛 인장 Das alte Siegeldeu (1844)
- 어릿광대의 성 Die Narrenburgdeu (1844)
- '''습작집''' Studiendeu (6권, 1844–1845): 여러 초기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상세한 수록작 목록은 습작집 문단 참조.
- 묘사된 전나무 Der beschriebene Tännlingdeu (1846)
- 숲길을 걷는 사람 Der Waldgängerdeu (1847)
- 가난한 자선가 Der arme Wohltäterdeu (1848)
- 프로코푸스 Prokopusdeu (1848)
- 자매들 Die Schwesterndeu (1850)
- '''갖가지 돌''' Bunte Steinedeu (2권, 1853): 다양한 돌을 소재로 한 단편집이다. 상세한 수록작 목록은 갖가지 돌 문단 참조.
- ''늦여름'' Der Nachsommerdeu (1857): 슈티프터의 대표적인 교양 소설이다. (장편 소설 문단 참조)
- 나의 증조부의 서류철 Die Mappe meines Urgroßvatersdeu (1864년 개정판 출간, 1939년 미완성 최종판 출간)
- 후손들 Nachkommenschaftendeu (1865)
- ''비티코'' Witikodeu (3권, 1865–1867): 12세기 보헤미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장편 소설 문단 참조)
- 젠체의 키스 Der Kuß von Sentzedeu (1866)
- 이야기들 Erzählungendeu (1869, 사후 출간)
4. 1. 습작집 (Studien, 1844-1850)
슈티프터의 초기 단편들을 모은 작품집 '''습작집(Studien)'''은 1844년부터 1845년에 걸쳐 총 6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되었거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주요 초기 단편들은 다음과 같다. 이 작품들은 슈티프터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발표 연도 | 원제 (독일어) | 한국어 제목 | 비고 |
---|---|---|---|
1839 | Der Condordeu | 콘도르 | |
1840 | Das Haidedorfdeu | 황야의 마을 | 『습작집』 수록 |
1841 | Feldblumendeu | 들꽃 (야생화) | |
1841 | Der Hochwalddeu | 고지대 숲 | 『습작집』 수록 |
1842 | Abdiasdeu | 압디아스 | 『습작집』 수록 |
1844 | Das alte Siegeldeu | 옛 인장 (낡은 인장) | |
1844 | Die Narrenburgdeu | 어릿광대의 성 (어리석은 자들의 성) | |
1844 | Brigittadeu | 브리기타 | 『습작집』 수록 |
1845 | Der Hagestolzdeu | [https://www.fadedpage.com/showbook.php?pid=20230909 헤게슈톨츠] (총각) | 『습작집』 수록 |
1845 | Der Waldsteigdeu | 숲길 | 『습작집』 수록 |
1850 | Die Schwesterndeu | 자매들 (두 자매) | |
초기 버전 (1864, 1939 완성) | Die Mappe meines Urgroßvatersdeu | 증조부의 서류함 | 초기 구상은 습작집 시기 |
4. 2. 갖가지 돌 (Bunte Steine, 1853)
'''갖가지 돌''' (Bunte Steinedeu)은 1853년에 출간된 총 2권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다양한 돌을 소재로 한 단편들을 모은 작품집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성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수록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반암''' (Granitdeu)
- '''석회암''' (Kalksteindeu)
- '''전기석''' (Turmalindeu)
- '''수정''' (Bergkristalldeu)
- '''백운모''' (Katzensilberdeu)
- '''석유''' (Bergmilchdeu)
4. 3. 장편 소설
- ''늦여름'' Der Nachsommerdeu (1857): 알프스 산록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 교양 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 ''비티코'' Witikodeu (3권, 1865–1867): 12세기 보헤미아를 무대로 한 역사 소설이다. 프르치체의 비티코와 로젠베르크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다.
5. 한국에서의 수용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작품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다이쇼 시대부터 소개되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쇼라이샤(松籟社), 슈에이샤(集英社), 치쿠마 문고(ちくま文庫) 등 여러 출판사를 통해 그의 주요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되었다. 예를 들어,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에서는 『수정(水晶) 외 3편』, 『숲 속의 오솔길(森の小道)·두 자매(二人の姉妹)』 등이 번역되었고, 쇼라이샤(松籟社)에서는 1980년대 『슈티프터 작품집(シュティフター作品集)』(전 4권)과 2000년대 『슈티프터 컬렉션(シュティフター・コレクション)』(전 4권)을 출간했다. 또한 『늦여름(晩夏)』, 『비티코(ヴィティコー)』[25] 등도 번역되었으며, 2012년 추오 대학(中央大学) 출판부에서 『빈(ウィーン)과 빈 사람들(ウィーン人)』을 출간하는 등 일본 내 소개는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적극적인 소개와 번역은 호리 타쓰오와 같은 일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한국 문단과 독자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슈티프터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의 작품 중 『수정』은 한국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다룬 특유의 맑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현재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으며 관련 연구와 비평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을 포함한 해외에서의 연구 및 번역 성과들이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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